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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Tian August 2022 W-ENTian August 2022

만화와 메디컬 아트 한 스푼 섞은 의사의 삶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진료조교수
메디컬일러스트 그리닥 대표
메디컬웹툰 닥터단감 작가
유진수

유진수 교수님은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삼성서울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를 수료한 후 현재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진료조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의학만화 '닥터단감' 작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메디컬일러스트 그리닥'이라는 메디컬아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칼럼을 통해 취미활동이 두 번째 직업이 되고 부캐와 본캐 활동을 함께 하는 의사의 삶에 대해서 연재하였습니다.

최근 들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약하는 의사 선생님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하는 부부 의사 선생님들부터 유튜브에서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채널을 운영하고 계신 선생님들, 미래 기술로 각광받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이끌어나가는 선생님도 계시죠. 신경정신과 선생님들 중에 책을 안 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각종 매체의 주요 섭외 대상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확실히 예전에 우리가 알았던 의사의 삶과는 결이 다른 모습입니다. 물론 여전히 일반인들이 의사에게서 기대하는 모습을 담아낸 의학 드라마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에 맞춰 조금씩 다른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만 드라마 속 의사 선생님들은 ‘일에는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이고 환자 앞에서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하고요. 수천만 어머님들의 애청 프로그램인 KBS 아침마당에 나오시는 선생님들 또한 전문적이면서도 따뜻함이 묻어 있는 ‘믿을 수 있는’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시곤 합니다.

바람직한 의사의 삶은 무엇인가

의사의 본분은 환자 진료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환자의 아픔을 해결해주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것일 것입니다. 의사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저같이 대학병원에서 재직하는 경우 진료, 연구, 교육 세 가지 주요 업무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세 가지 업무를 모두 잘 해내는 게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진료와 연구에 비중을 두고 후학 양성에는 신경을 많이 못 쓰고 있는 교수님들도 (저를 포함해서)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후배 의과학자 양성에 노력해야 하지만 후배들은 선배들에게 푸념을 늘어놓기 쉽지 않으니 약간 비겁한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 셈이랄까…

의사 개인의 삶은 어때야 할까

의사면허를 부여 받은 지 1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과거에 상상했던 모습처럼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당시 의사의 모습은 긴 근무 시간, 끝없는 당직, 가족 없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다행히도 그사이 세상도 변했고 의료 시스템도 변했고 의사의 삶도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13년 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조금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업무로 가득 차 있던 의사의 삶에서 딱 한 스푼 정도 덜어낸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좋을까요? 너무 다양한 보기가 있겠지만 대부분 가족과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기시는 분들도 있고 다양한 삶을 즐기는 모습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만화와 메디컬 아트, 한 스푼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 또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마치 업무의 연장(?)처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가족이 희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사로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듯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는 요즘 의사 선생님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 스푼이 특이한 점은 아마도 그 빈 자리에 만화와 메디컬아트를 반 스푼씩 넣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그림에는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평범한(?) 모범생답게 주로 학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그림은 대부분 낙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만화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미국 Fox TV의 만화 ‘심슨 가족’을 즐겨 봤을 뿐입니다. 그나마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태블릿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습량이 요구되는 의대생 시절에는 취미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고 뚜렷하게 작품활동을 할만한 소재 또한 찾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전공의 수련 기간을 거치면서 십 년 넘게 미뤄왔던 그림을 그려야 할 동기부여를 드디어 얻게 됐습니다.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나 보호자와 의료진 간의 소통의 부재 문제가 항상 존재했습니다. 어려운 의학적인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일인데 여기에 시간을 들여 설명해줄 시간이 있는 의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림이나 만화 같은 이미지를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죠. 수술에 많이 참여하게 되면서 수술의 내용을 기록하는 수술기록지는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정형화된 수술이 아닌 경우 이를 잘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연스럽게 수술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교수님들이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논문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한테 그려달라는 분들이 하나둘씩 늘어갔습니다. 결국 이런 환경 아래에서 환자들에게 건강 의학 지식을 설명하는 닥터단감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고 메디컬일러스트를 전문적으로 제공해주는 서비스인 그리닥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공의 시절에는 만화를 그릴 틈이 없었기 때문에 ‘충수돌기염’과 ‘담석증’ 에피소드 정도만 완성했고 ‘닥터단감의 의학 이야기’에 포함된 나머지 대부분의 작업은 군의관 복무 시절에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홈페이지 제작 등은 관련 서적을 참고해서 꾸역꾸역 만들어 냈고 결국 훌륭한 연구자들의 가치 있는 연구에 화룡점정을 넣는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처음에 그렸던 충수돌기염 편의 닥터단감(왼쪽)과
비교적 최근에 그린 메니에르씨병 편의 닥터단감(오른쪽)

만화 그리는 의사와 닥터단감

닥터단감에 대해 많이 물어보시는 질문은 ‘왜 단감이냐’는 것입니다. 닥터단감은 평소 차갑고 친절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저의 단점을 극복해보고자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는 소재를 찾다가 고르게 된 캐릭터입니다. 지금 와서는 사람들이 닥터단감과 제가 닮았다고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나름 전략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자주 받는 질문은 ‘돈 좀 벌었냐?’는 질문입니다. 아쉽게도 닥터단감으로 얻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은 크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 기획 당시에는 순진하게도 ‘나 엄청 부자가 되는 것 아니야?’라고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정확한 정보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해주는 매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화라는 형식을 이용하면 엄청난 유명세를 떨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더군요. 현재까지 출간된 세 권의 단행본 ‘닥터단감의 의학 이야기 1/2권’과 ‘닥터단감의 만화정신의학’ 판매 인세로 얻은 수익이 워낙 미미해 제가 직접 구매한 책값으로 아마도 거의 다 쓴 것 같고 그나마 현재 정기 연재하고 있는 만화의 원고료들도 매우 저렴한 편이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닥터단감을 단지 금전적인 면으로만 평가하지 않습니다. 닥터단감을 통해 많은 일반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 됩니다. 큰마음 먹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마감에 쫓겨서 반강제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특히 곧 출간될 ‘닥터단감의 간이식 만화’같이 제가 하는 업무와 연관해서 진료실에서는 차마 보여줄 수 없는 개그를 섞어 넣은 만화로 제가 만나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복 받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현재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동아일보 ‘만화 그리는 의사들’, 보령제약 ‘디어닥터’, 대한보건협회 ‘건강생활’ 등의 콘텐츠를 그리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간이식/간암 이외의 건강 정보’를 공부하는 것도 힘들긴 하지만 삶에 다양성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중장기적인 계획으로는 현재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네컷만화 단행본을 출간하고 딸래미가 사춘기가 되기 전에 어린이들을 위한 인체 만화를 그리는 것입니다. 돈은 안 되겠지만 그런 작지만 소박한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닥터단감입니다.


[그림] 단행본으로 출간된 ‘닥터단감의 의학 이야기 1/2권’, ‘닥터단감의 만화정신의학’(왼쪽 위)
신문 지면에 2022년 6월 16일에 발행된 ‘닥터단감의 도시 서바이벌-거꾸로 걷기’편(왼쪽 아래),
‘닥터단감의 도시 서바이벌-생활 소음성 난청’(오른쪽)

그리닥과 메디컬 아트, 그리고 융합 의료

닥터단감이 오로지 저의 작업물이라면 그리닥을 통해 진행되는 작업물은 의뢰인과의 공동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메디컬일러스트 작업에 대한 저작권은 아티스트가 가지고 사용권을 의뢰인이 가지는 방향으로 계약 관계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작업물을 활용하는 주체는 의뢰인이기 때문에 개별 작업물에 대한 애착도 작품마다 다릅니다. 저도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니 다른 분의 작업을 도와드린 것보다는 제 연구에 필요한 그림을 직접 그린 경우가 애착이 제일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자기만족’보다 ‘경제적인 이득’인 것 같습니다. 의뢰받은 그림은 뚝딱 그려버리는 반면 제 연구를 위해 그리는 그림은 왜 그렇게 시작하기 힘든지…
메디컬아트 분야에서 활동하는 의사가 희소한 반면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에 대한 관심 증가와 저작권에 대한 인식 개선이 동반되면서 제 ‘깜냥’에 안 맞게 대한메디컬아티스트 학회에서 이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것은 메디컬 아트 자체보다도 거기서 연결되는 이른바 융합 의료입니다. 인천 카톨릭대학교대학원 바이오메디컬아트 석사과정을 교육받은 인재들과 협업으로 메디컬아트를 넘어 메디컬 비쥬얼라이제이션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융합 의료 연구들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DICOM 데이터를 이용한 3D 모델링을 기반으로 딥러닝을 이용한 자동 3D 모델링이라든지 다양한 목적의 3D프린팅, 그리고 가상현실/증강현실(Virtual reality/Augmented reality)로 적용 확대까지, 4차산업혁명의 주요 도구들을 임상 의료현장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제 몫은 간암과 간이식을 포함한 장기이식에 국한되겠지만 이런 연구 경험은 다른 세부 전문 분야에 그대로 확대 적용 가능할 것입니다.


[그림] 직접 그린 메디컬일러스트가 SCI 저널의 커버 이미지로 발행된 그림 <Liver Transplantation>지(왼쪽)
VR로 환자 수술 전 교육을 하고 있는 사진(오른쪽 위)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서 간이식 전 이식편 결정을 하는 사진(오른쪽 아래)

한 스푼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의사 커리어의 다변화

비록 저는 아직 의사 생활을 한참 더 해야 하는 30대 의사이지만 지난 13년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한 스푼만 덕분에 의사로서의 제 삶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의 일상생활 중 겨우 1%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을 투자했던 일이 훨씬 다양한 색채를 띠게끔 변화를 일으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한 스푼 가지고 꼭 뭔가를 이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스푼이 불러일으키는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도전해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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