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다양한 목적으로 주고받은 연락 말미에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인사말입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 마음을 담는 양에는 차이가 생기고, ‘하루’를 ‘한주 시작’이나 ‘밤’, ‘주말’ 등으로 때에 맞게 변경하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장 좋은 것은 그의 평안이라는 생각만큼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일과 자기계발, 집안일, 인간관계 등으로 바쁘지만 늘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들 속에서 각자가 품고 있는 무수한 이유로 마음의 평안은, 크게는 일신상의 중대사로부터 작게는 정말 사소한 누군가의 한 마디만으로도 이지러지곤 합니다.
사회인으로서 표출되는 감정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전략에서 장인 수준의 내공을 지니고 계신 분들께 소개하기에도, 늘 생활 속에서 접하기에 새삼 취미라고 내세우기도 민망하지만, 저는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이 가장 평안합니다. 유년기에 잠시 배웠던 피아노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소한 음감과,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 국내 음악 플랫폼들과 빌보드의 ‘현 시대 차트’와 동떨어진 취향이 더해져 좋게 말하면 폭넓은, 나쁘게 말하면 아집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을 ‘Paranoid android’와 동일시했던 청소년기부터 이제는 BTS의 ‘봄날’이나 아이유 노래들의 예쁜 노랫말들 또한 진심으로 좋아지기까지, 많은 선율과 가사들로 마음 저만치 깊이 뚫린 곳부터 메워 올려왔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들 중 마음이 지하 2층쯤에서 더 내려갈 것 같은 ‘어떤 날’에 재생시켜 둘 만한 곡들을, 첫머리에 드렸던 인사에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선곡해 드릴까 합니다. 개별 선곡이 마음에 드실 때 전체재생 해 보실 만한 각 음악가의 앨범들은 삽입 이미지로 소개해 드립니다.
탁해진 마음을 흘려버리고 지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첫 곡은, 밴드 넬(NELL)의 ‘희망고문’입니다
그림 1 (좌) 행복했으면 좋겠어 (2018.11.14)
(우) C (2016.08.19; 원곡버전 수록)
도피라는 해결책은 싫어하지만, 그런 마음만큼은 무조건 외면하지는 말고 차곡차곡 모아 두는 것이 해결 또는 해소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내용은 등을 두드려주면서 하는 얘기 같으면서도 제목을 보는 순간 위로를 하는 게 맞는건지 의구심이 생기지만, 오래 이들의 음악을 들어온 사람들은 이들의 직설적이고 팩트폭행에 가까운 체념성 위로에 익숙해져 있지요. 정확히 중2(!) 때부터 들어왔던 그들의 음악은 유명해진 밴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 관대해지는 routine을 밟고 있지만, 그 또한 의미 있는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어쩐지 지친 날이면 몸은 떠나지 못해도 마음은 겪어온 시간들 속의, 그저 고요하지만은 않은 ‘바다’에 종종 돌아가 있습니다. 그런 바다가 잔잔해져 흘러가, 대양처럼 넓고 호랑이처럼 강인한 마음을 지니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두 곡으로 많은 분들이 오랜만에 들으심직한, 패닉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 어쩌면 아무도 모르실 수 있는 영국의 인디 팝 듀오 Oh wonder의 ‘Oceansize’를 들려드립니다.
그림 2 (좌) PANIC - SEA WITHIN (1998.01.01)
(우) Oh wonder - Home Tapes (2020.06.26)
어떤 날, 마음에 얹힌 무언가는 말로 쉽게 꺼내놓을 수 있기도, 차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래 가사는 그 노래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되기도, 오히려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서 ‘말의 언어’를 내려놓고 들을 수 있는 연주곡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받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 그 정도 깊이를 갖추지 못한 미숙한 어른이어서인지 고전 클래식에는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기가 어려워, 주로 ‘Neo(Post)-classic’, ‘Classical cross-over’로 분류되는 장르의 음악들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 중, 최근 가장 자주 듣다 잠드는 아이슬란드 작곡가 두 명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Ólafur Arnalds
3055
Epilogue
그림 3 (좌) Living Room Songs (2019.04.29)
(우) some kind of peace (2020.11.06)
Ólafur Arnalds는 Wikipedia에서 multi-instrumentalist and producer로 소개되며, 많은 post-classic 음악가들이 그러하듯 영화나 드라마 OST에 참여하거나, 어쩐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해진 ‘Grammy awards’에 올해 nominate 되는 등 비교적 활동 범위가 넓은 artist입니다. 북유럽 음악가들의 곡에는 공통적으로 시린 대자연에서 모아 넣음직한 특유의 정서가 있는데, Arnalds의 곡들에서는 언 공기 속 화목난로의 따스함을 좀 더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림 4 (좌) Bylur (snowstorm, 2021.04.23)
(우) Frost (2022.04.08)
Eydís Evensen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소개글로 인용하고 있는 기사의 내용처럼 언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 기후를 아이슬란드의 정서로 풀어내는 pianist & composer입니다. 함께 읽음직한 문장과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Eydís Evensen
Wandering II
Numb
그림 5 Elephants...Teeth Sinking Into Heart (2008.10.06)
혼자서 능동적으로 흘려보내기 어려운 일들과 사람들은, 그냥 다 씻겨 내려가버리기를 바라는 수동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폭풍우 뒤로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을 담은 Rachael yamagata의 ‘Over and over’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목소리를 악기로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삽입곡 등으로 한국에도 제법 팬이 많은 그녀의 음악은, 첫 내한공연에서 꼭 안겼던 때의 포근함을 기억하게 합니다. 음원보다 훨씬 풍부한 성량과, 밝고 명랑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녀의 다른 분위기의 곡들 역시 살짝 소개해 봅니다. (Be be your love, Worn me down, Starlight)
다음으로 들려드릴 곡들은 머리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는 직접적인 위로의 언어로 채워진 곡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고 공허할 뿐이라고 느낄 때도 많지만, 분명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한 곡이라도, 한 줄의 가사라도 마음에 닿아 비틀려가는 곳을 받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저처럼 말이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연주 역시 즐길 수 있는 곡들로 꾸려봤습니다)
한희정 – ‘꿈꾼다’
새소년 – ‘난춘’
호피폴라 – ‘너의 바다’
선우정아 – ‘울지마’
공사다망하신 교수님, 선생님들께서 굳이 음악을 들으시려면 그날 뉴스나 인터넷, SNS를 접하는 시간이라도 희생해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사람들이 소환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악마들” 3) 을 무시하고 좋아하셨던 노래들, 같은 것들을 고민하며 시간을 나눴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시면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을 흘려버리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런 의미로 감히 말이 필요없는 두 곡을 전해드립니다.
3)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웅진지식하우스, 2006, 147p. (키르케고르 인용구)
(좋은 책을 나눔해주신 아주대 박헌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Pink Floyd – Wish you were here (1975)
Beatles – Let it be (1970)
그림 6 POLYGON (2017.05.11)
조금은 마음이 잠잠해지셨을까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하동균 – “Beautiful things”를, 마지막 앨범 이미지와 함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감정을 성량과 함께 폭발시키는 보컬이 점점 적어지는 추세이지만, 일부러라도 가끔은 그런 압도적인 전달력을 지닌 분들의 노래를 찾아 듣고는 합니다. 그렇게 없애지 못할 기억들은 흘려보내면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너무 낯설고 실험적인 음악들은 아무리 좋아도 평안한 시간을 보내게 해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가능한 이 글의 제목에서 오마쥬한 ‘Acoustic cafe’ 앨범들의 제목 (‘For your loneliness/tears/memories’)처럼,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편안하고 간간이 익숙한 BGM이 될 수 있도록 구성해 보았습니다. “만일 감정적으로 왔다갔다하지 못한다면 상실 속에서 평온을 발견할 힘을 결코 얻을 수 없다.” 4) 는 문장처럼, 지상과 지하를 수시로 오가는 마음을 붙잡아가며 기능하는 나날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평안한 삶’일 것이라는 철든 생각을 하려 노력합니다. 이 글이나 다루어진 음악들에 의해 오늘도 애써 힘내고 계신 교수님, 선생님들의 마음이 잠시나마 쉬어가고, 좋아했던 것들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시는 계기가 되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인빅투스, 2014, 60p.
마지막 곡으로 자우림의 ‘Light, delight’를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