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설탕과 프림 없인 쓰기만 한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학교 시절부터 이래 저래 사람들을 만나면서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를 좋아하시는 어머님 덕분에 제 몸의 유전자가 카페인에 저항성이 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녁에 커피를 마셔도 심장 두근거림이나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일이 드물긴 합니다. 그래도 요즘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저녁 9시 이후로는 커피를 안 마시려고 노력 중입니다.
커피에 얽힌 가장 어릴 때의 추억은 이제는 없어진 미도파 백화점 식당가에서 어머니가 비엔나 커피를 시키시고, 저는 그 위의 크림만 떠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주방에서 화재가 나서 사람들이 막 뛰쳐나왔던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달콤한 크림을 떠 먹다가 어머니 손에 끌려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역사적인 인물들 중에도 커피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 많죠. 작곡가인 바흐가 너무나 커피를 사랑해서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것은 다들 잘 아시죠. 베토벤은 특이하게 커피를 마실 때 원두를 하나하나 세어서 60알에 맞추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문호 오노레드 발자크는 하루에 커피를 50잔 가까이 마실 정도로 커피 애호가였는데, 덕분에 항상 위궤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전적 에세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에서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울림처럼 따스했다.’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커피는 밝은 팝송보다는 약간 처진 듯 하지만 맛깔스러운 재즈와 어울리는 음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귀를 전문으로 보는 의사로서, 특히 제 이메일 주소를 meniere@amc.seoul.kr로 쓸 만큼 메니에르 병에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메니에르 병이나 편두통성 어지럼 환자를 진료하면서 식습관을 지도할 때, 커피를 줄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참 죄송스럽습니다. 요즘에는 아침에 가볍게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는 드시라고 말씀은 드립니다. 커피 좋아하는 분이 갑자기 안드시게 되면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메니에르 병 악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탄산음료가 더 카페인이 많을 수도 있다는 사람을 의외로 많은 환자들이 모르고 있기도 합니다. 카페인은 중추신경계통의 각성제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이지만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합법적이고 규제가 없죠. 카페인의 우리 몸에서의 생리작용은 잘 아시니까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만, 제가 경험했던 커피에 관한 에피소드는 예전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미국은 어느 장소에 가도 커피 인심이 참 후한 나라입니다, 지루한 실험을 하면서 졸음도 쫓을 겸 낮 동안 커피를 물처럼 마셨더니 주말만 되면 편두통 발작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원인을 몰랐는데 주중에 커피를 줄였더니 진정되었습니다.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카페인의 하루 섭취 권장량은 성인 기준 400mg입니다. 카페인은 커피가 물과 만나 추출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용출되는 양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한 잔 기준으로 찬물에 오랜 시간 동안 추출하는 콜드 브루(212mg) > 핸드 드립 커피(200mg) > 아메리카노(125mg) > 에스프레소(75mg) 순입니다. 사람에게 카페인의 치사량은 10g이니까 하루에 아메리카노 커피를 80잔 마시면? 아마도 불가능한 양일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콜드 브루 혹은 드립 한 잔보다는 아메리카노 두 잔을 더 선호합니다.
저는 연구실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제 연구실에는 프렌치 프레스, 드립 커피 용 드리퍼 및 주전자, 에어로 프레스, 그리고 더치 커피 만드는 기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때 이디오피아 예가체프로 내린 더치 커피의 향에 중독되어 저녁에 퇴근하기 전, 더치 커피 기기를 잘 세팅하고 다음날 출근하면 연구실 가득 풍기는 커피 내음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제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세 개나 가지고 있는데요, 집에는 드롱기에서 나온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연구실에는 비알레띠에서 나온 저렴한 모델을 쓰다가 이번에 진짜로 ‘큰 맘’ 을 먹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레빌(http://www.breville.com)사에서 나온 최상급 에스프레소 머신인 ‘오라클 터치(BES 990)’를 직구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총판에서 사는 것이 전압과 펌프 등이 우리나라 상황에 맞아서 편하긴 한데, 직구를 하고 제가 직접 교체하는 비용이 10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나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호주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일단 제대로 된 머신을 구입했는데, 여전히 신경 쓸 것이 많긴 합니다. 물 온도, 원두의 분쇄 정도, 추출 시간 등 뭔가 지금 내리는 커피보다 더 나은 커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즐거운 고심을 하게 됩니다. 최근 커피를 추출하는 포터 필터(portafilter) 중 필터의 바닥에 커피의 추출구인 스파웃(spout) 없이 바로 바스켓에서 추출되는 naked (bottomless) 포터 필터를 구입했더니 추출 액이 사방으로 튀어서 별로라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었습니다. 그랬더니 커피 고수들과 바리스타들이 ‘그건 당신이 제대로 탬핑을 안하고, 분쇄를 너무 굵게 해서 ‘채널링 현상’ (커피 추출이 일정하게 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서 그런 것이다.’ 라는 지적을 받고 부랴부랴 분쇄도를 이리 저리 조절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또한 커피를 즐기는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드립 커피보다 에스프레소를 이용한 아메리카노가 인기죠? 아무래도 식사 후에 구수한 숭늉을 즐기던 취향이 유전자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에 신 맛의 산뜻한 커피보다는 묵직하고 약간은 쓴 커피를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드립 커피는 일단바리스타가 드리핑을 직접 해야 하니까 가격도 좀 비싸고, 상대적으로 약배전(midium-roasting)의 원두를 이용하기 때문에 커피 풍미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만, 에스프레소의 경우 드립 커피보다 강하게 원두를 로스팅해서 짙은 풍미를 가지기 때문에,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각종 베리에이션 커피들, 예를 들어 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페 모카 등의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도 평소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 차분하게 주말 아침을 즐기는 의미에서 드립 커피를 내립니다. 드리핑을 할 때 은은하게 코로 들어오는 커피의 향이 너무 신선하고 좋거든요.
분쇄 전 적당히 로스팅된 커피 원두를 보면 윤기가 흐르고, 막 내린 에스프레소 위에는 황금색 거품의 크레마를 볼 수 있습니다. 로스팅할 때 커피콩 조직에서 나오는 다양한 지방산 때문인데, 이 중 카페스톨(cafestol)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카페스톨은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는 담즙의 생성을 방해하여 체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올리기 때문에 고지혈증을 악화시키고 심혈관 위험도를 올린다고 알려져 있죠. 2020년 4월에 European Journal of Preventive Cardiology에서는 노르웨이에서 20세에서 79세의 남녀 508,747명을 대상으로 커피를 마시는 방식과 양 등에 대해 20년 정도 추적관찰 및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를 정리한 대규모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저자들은 이 연구에서 남녀 모두 드립 커피처럼 종이 필터에 커피를 걸러서 마시는 사람이 에스프레소처럼 직접 내려서 마시는 사람에 비해서 심장-혈관 질환과, 허혈성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하였고, 특히 하루에 9잔 이상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들이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하루에 4잔 이하로 드립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오히려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적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아직 제 주변에는 매일같이 에스프레소 9잔씩 마시는 분은 없지만 어쨋거나 커피를 많이 드시는 분들은 아무래도 에스프레소보다는 드립 커피를 드시는 비율을 늘리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진한 에스프레소가 댕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어떠신가요? 앞으로도 즐겁고 건강한 커피 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설명>
왼쪽 위 사진은 연구실의 여러가지 커피관련 용품들, 왼쪽 아래 사진은 그라인더와 전기 포트, 그리고 커피 관련 서적들,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올해 8월 구입한 브레빌사의 오라클 터치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