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교수는 의사 과학자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공학박사를 취득하였습니다. 2010년 남극세종기지 파견 경험을 계기로 융합과학, 빅사이언스, 미래의료와 디지털헬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한극지의학회 창립멤버이자 총무이사로 극지의학 분야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본고에서는 남극대륙 미개척지 탐사와 극지의학에 대해 소개합니다.
남극에는 70여개 넘는 각국 과학 기지가 있고, 매년 120여 명 넘는 의사가 파견됩니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에 의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인류의 오랜 탐험 역사에 의사들이 함께 해 온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1910년대 초 '아문젠-스콧’ 남극점 정복 경쟁 이야기에서 그 상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극점 탐험대의 일원으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영국 스콧 탐험대 ‘최후의 3인’에는 윌슨이라는 의사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1912년 영국 스콧 남극 탐험대와 2023년 대한민국 미답지연구단 K루트 남극탐사대.
각각 의사가 한 명 포함되어 있다. (영국 극지연구소, 대한민국 극지연구소 제공)
남극에서 겨울을 나며 일련의 임무 수행을 하는 그룹을 ‘월동대(Overwintering team)’ 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1988년 남극세종기지에 1차 월동대 의사가 파견되었습니다. 현재 세종기지에는 36차 월동대가, 2014년 생긴 장보고기지에는 10차 월동대가 임무수행 중입니다. 여기에 2009년 건조된 쇄빙연구선 아라온에도 매년 의사가 선의로 탑승합니다. 주요국에 비해 남극 진출은 다소 늦었지만, '극지인’ 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극지과학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의학분야 또한 남극 경험을 가진 의사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대한극지의학회’ 를 중심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극에서 이뤄지는 많은 활동들은 우선 남극조약체계 등 국제조약에 의해 규제됩니다. 또한 먼 거리에 위치해서 물자나 사람의 이동 자체가 비싸고 어렵습니다. 극한의 환경 때문에 현장에서는 각종 변수가 많고 예측이 불가합니다. 이러한 제약 하에서도 과학연구를 기본으로 하는 정교한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남극기지 운영, 특히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탐사 활동은 지켜야 할 것도 많고 그 난이도 자체가 상당합니다.
남극에 파견되는 의사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극의사와 그 의사를 지원하는 지원체계 또한 같은 도전에 직면합니다. ‘정상’ 환경에서는 건강하던 사람도 ‘비정상’ 환경에서는 아프고 다치기 쉽습니다. 남극에서 지내는 동안 대원들은 수많은 자연환경 및 작업환경 위험에 노출됩니다. 이에 반해 팀에 단 한 명 포함되는 남극의사는 이른바 ‘슈퍼맨’ 이 되어 동료들의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건강검진이나 교육은 비교적 쉬운 난이도의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평소 안해보던 의약품과 의료 물품 준비는 중하 정도, 남극 병원의 ‘올인원’ 진료(접수-진료-검사-진단-처방-조제-투약-사후관리)는 중상 정도의 난이도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갑작스런 사고나 재난적인 응급상황이 생기면 그 난이도는 급격히 올라가는데, 특히 수술이 필요한 응급 치료와 후송 판단은 현장에서 의사 한 명이 대응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남극에 가는 의사들에게는 오히려 가슴을 뛰게 하는 매력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지의학회에서 보고된 증례 중에는 남극 겨울 초입에 발생한 편측 안검하수 주소의 환자가 뇌동맥류 파열 직전에 가까운 육지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극적으로 시술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항공편이 제한되어, 쇄빙선 편에 남극해를 거쳐 악천후를 뚫고 수일에 걸쳐 해상 후송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자 후송에 동행했던 내과 선의의 아찔했던 경험 공유와 남극에서의 응급의료 대응 체계에 대해 제안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남극 활동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은 2027년 제2쇄빙연구선 건조 계획, 2030년 남극 제3기지 건설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제1차 극지활동 진흥 기본계획). 이 가운데 새로 지어질 기지의 경우는 K루트 팀의 탐사를 통해 남극대륙 깊숙한 곳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이곳은 한겨울이 되면 육로, 해로, 항공로 모두가 단절됩니다. 유사시를 대비한 응급의료체계가 남극에 반드시 구축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겠지요.
아시다시피 남극은 지구상 극한의 환경을 가진 곳입니다. 크게는 극저온, 건조, 낮은 산소분압, 강한 바람, 자외선, 극야, 백야와 같은 ‘극한 자연환경’ 은 물론, 신체활동 저하, 사회적 고립, 가족 및 친구와의 단절, 폐쇄되고 제한된 공간, 동료간 관계, 적응 문제와 같은 ‘극한 생활환경’ 에서의 건강 위해 요소가 상시 작용합니다. 또한 육-해-공 각종 작업 중 안전사고 위험이 늘 도사립니다. 고립된 환경에서 의료 인프라에 접근이 극히 제한되므로, 남극에서의 응급 상황 발생은 곧 생명에의 위협을 뜻합니다.
이에 대응하는 의료는 기본적으로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남극에 좋은 의사를 선발해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응급 시스템 구축과 위험관리가 필수적입니다. 이는 파견 전 건강검진(메디컬 스크리닝)과 의료진 교육훈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극단에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항공후송(Medevac) 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인근 국가의 의료 인프라와 국내 원격 협진체계를 포함하여 헬리콥터, 비행기, 선박 등을 이용한 부상자나 환자를 수송하는 전반의 계획과 프로토콜, 그리고 훈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응급의료 시스템은 상당한 투자와 준비가 필요하지만, 남극 활동 인구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사진) 대한극지의학회 학술대회 개최 모습 (대한극지의학회 제공)
수년 전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 극지의학회에 참석해서 들었던 발표 중에 재미있는 연구가 하나 생각납니다. 일명 ‘Sea legs’ 연구로, 남극 쇼와기지 월동을 경험한 이비인후과 의사가 발표한 내용이었습니다. Sea legs는 선원들이 배에 타서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다 보면 얻게 되는 바다에서의 적응 능력을 의미합니다. 남극해로 향하는 쇄빙선에서 높은 파도 속 선원과 일반인(과학자)의 균형감각과 어지러움 등을 비교 분석한 연구로, 닌텐도 게임기에 포함된 발판과 자이로스코프 모듈을 이용하였던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처럼 남극에서의 경험, 특히 질병이나 사고 사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남극의사들의 노력은 자연스럽게, 또 창의적인 의학연구로 이어집니다. 남극에서 매년 발생하는 상병을 중심으로 하는 임상의학 연구뿐 아니라, 미생물학이나 생리학 같은 기초의학 연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활동이 중요한 것은 다시 그 결과를 현장으로 환류해 남극 활동자들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국, 특히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도 이러한 극지의학 연구가 최근 활발합니다.
남극에서 이뤄지는 의학 연구분야로는 남극에서의 인체 변화, 생리학, 정신건강과 심리학 같은 전통 주제부터 분자생물학, 미생물, 감염병, 호흡기, 피부질환, 영양, 고산 및 저압환경 질환, 해양의학, 항공우주, 원격의료, 응급후송, 외상외과, 공중보건, 예방의학, 직업환경의학, 의료정책, 의료데이터, 디지털헬스, 국제협력, 의료윤리와 법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의학 분야를 아우릅니다. 아직 소수이지만 우리나라도 이러한 극지의학 연구가 극지의학회 소속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수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남극에서 아프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남극 월동대원들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가 바로 남극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한 명의 의사로 부족한 극지의료 서비스를 위해, 또 생존을 위해 원격의료가 필연적으로 사용됩니다. 멀리 국제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남극에서 이루어지는 원격의료는 넓게 의료자문 및 협진까지 포함하면 까마득한 시절의 인공위성 전화와 팩시밀리 통신부터, 인터넷 기반의 메신저와 이메일, 최근의 모바일 화상 연결까지 이어집니다. 현재 원격의료장비가 각 남극 기지에 설치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에는 통신을 비롯한 관련 기술의 제약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이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극지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남북극기지 의료 응급상황 및 위기대응 관리를 위한 확장현실기술 기반 원격협업 프로토콜 연구개발’ 과제를 수행 중입니다. 목표는 AR/VR/MR/XR로 대표되는 디지털 헬스를 적용해 응급의료 협진 프로토콜을 구성하고, 적정기술 개념을 남극 현장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처음 연구시작 당시에는 원격으로 의료진 간에 소통하는 데에 열악한 통신속도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존 KT망 업그레이드와 최근에 서비스를 시작한 STRALINK 단말기 도입 등으로 남극 통신 여건이 개선될 여지가 커졌습니다. 가까운 미래 남극 통신환경 개선에 발맞추어 향후 그 성과가 주목됩니다.
(사진) 남극대륙 탐사 현지에서 원격협진 테스트를 수행 중인 남극의사 (극지연구소 미답지연구단 제공)
또 다른 차원에서 남극은 극저온, 고립, 원거리, 고산 및 유사진공 등으로 인해 우주 아날로그(유사환경) 요건을 두루 갖춘 곳입니다. 남극기지, 쇄빙연구선, 남극횡단연구 장비를 30년 이상 운영 중인 우리나라 남극 인프라는 세계적 수준입니다. 해외 주요국은 극지-우주 의학 연구협력이 유인 우주탐사 프로젝트와 연계되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극의 우주 아날로그 연구는 대표적으로 호주 남극연구단의 50년 연구결과가 정리된 바 있습니다. 고전적인 생의학 및 인체변화 연구로부터 확장된 현대의 우주 인간 연구는 크게 ① 인간요인·행동, ② 탐사의료, ③ 인체건강, ④ 연구운영·통합, ⑤ 우주방사선 5가지로 나뉩니다. 각 항목 모두에 남극과 우주의 의학적 협력 지점이 존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남극 탐험가들은 오늘과 같은 미래를 상상하였을까요? 남극을 향한 위대한 도전은 다음 백 년 인류가 달과 화성을 드나들고, 나아가 금성과 목성 정복을 꿈꾸는 것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유독 극지나 우주 공간에서의 인간 연구에 인색한 편이었습니다. 다행히 최근 민간 우주 사업 붐에 힘입어 정부 차원의 우주청 설립 등 변화가 예상됩니다.
과거의 실패나 시행착오는 미래의 성공을 위한 예비단계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작은 생각에 우리나라도 이제 남극이나 우주공간의 인간 대상 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왕 할 것이면, 누가 먼저인지 보다는 함께 하고,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하고, 좀더 재미있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림) 우주공간 내 인간연구를 위한 우주 아날로그 테스트베드 모식도
본고 내용 중에는 다음의 연구과제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1) 2021년도 교육부(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사업 NRF-2021R1A6A3A01086756, (2) 2021년도 해양수산부(극지연구소) 국내 학·연 극지연구 진흥프로그램(PAP사업) PE2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