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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TIan August 2020 W-ENTIan August 2020

어느 성찰자의 좌충우돌 교육기 건양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천경희

김홍빈

누군가 나의 교육철학에 대해 물으면, 나는 스스로를 ‘구성주의자’로 정의하면서 ‘Learning by Doing’이 내가 믿는 교육철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정확히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의과대학 교수’ 라고 답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작가’가 장래희망인 ‘디자이너’이자 ‘문제해결 도우미’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의 서두에 쓴 모든 강조 단어들은 사실 그냥 불쑥 나를 정의하게 해주는 이름들이 아님을 밝힌다. 어쩌면 처절하고도 부끄러운 경험들의 산물이자, 미천하나 그래도 조금씩 덧붙여진 나의 경력들이 만들어낸 의미 덩어리 들이다. 그리고 이 칼럼을 빌어 이런 나의 의미 덩어리들이 내 것이 되도록 만들어준 몇 가지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내가 책이 아닌 경험으로 얻게 된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를 변화시킨 가장 큰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을 훌쩍 넘은 어느 청춘시절, 그야말로 나이가 좀 들어 보이고 싶어 말도 안되는 파마 머리를 하고서 의기 충천하던 교생실습 시절에 일어났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교생이 된다는 것은 초등이나 중등 교육 기관에 가서 처음으로 교육하는 이로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자체 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뜨끈한 경험이 된다. 아마도 의과대학생이 처음 ‘의사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게 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교생실습 기간에는 각 교생들이 개별 발표 수업, 즉 공개수업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교수진과 교사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게 되는데, 나에게도 그 떨리는 과정이 찾아왔다.

당시 맡은 과목이 ‘윤리’교과여서 가정,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의 개념과 그 관계에 대한 부분을 강의하게 되었고, 그 시절 PPT와 실물화상기를 이용하여 그야말로 나름 준비된 강의를 하였다. 사실 교수님들께 ‘천상 선생’될 친구라는 칭찬도 받았던 터라 그야말로 의기와 열정이 넘쳤고, 공개수업에 맞추어 준비한 강의자료들은 교과서에 충실한 깔끔한 내용들이었으며, 매끄럽고 심지어 여유롭게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수업이 끝날 때 즈음 의례적으로 “질문 있는 사람?”이라고 툭 하니 물었고,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한 학생이 슬그머니 손을 드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학생이 앉았던 그 자리를 기억한다. 2분단, 2째줄, 오른쪽에 앉았던 학생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선생님, 오늘 수업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하라고 하셨는데요…… 우리 아버지께서 매일 술을 잡수시고 들어와서 엄마와 저, 그리고 동생을 때려요. 그래도 아버지께 효도를 해야 하나요?”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이런 질문을 지금 듣는다 해도 나는 당황하여 진땀을 뺄 것이다. 그러나 그 까마득한 청춘시절, 내 창문 밖 세상을 제대로 몰랐던 새파란 교생 선생이었던 나는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삐쭉 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름 다행스레 현명한 대답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학생이 존재하게 해 주신 분이니 그 부분은 감사하자는 말과 함께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엄마와 동생, 그리고 본인을 보호하는 것이니 수업 마치고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다. 수업은 잘 마무리되었고, 수업 후 상담 선생님과 연결해 주는 등 나름 무엇인가를 하였는데, 사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말들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아이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질문 내용만큼은 지금도 너무나 뚜렷하게 각인되어 남아 있다.

나는 그 일화를 대학으로 돌아와 보고회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였고, 그때부터 우리의 교육이 교과서 안에 있는 죽은 내용이 아니라 교과서 밖 살아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가르치고 전달해야 하는 지식이 책 속에 든 것이라면, 우리가 진짜 가르치고 진짜 전달해야 하는 것은 책 속 내용이 어떻게 세상에서 해석되고 활용되며 또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것이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깊이 있게 숙고 해보지 않은 지식, 즉 교과서 안에 있는 내용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며,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현장의 내용과 연계될 때, 우리의 삶이나 행위와 연계될 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2분단, 2째줄, 오른쪽에 앉았던 학생은 나의 스승이 되었고, 나는 구성주의자로서 ‘Learning by Doing’을 외치며 현장과 실생활에서 수행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 진정한 학습임을 강조하는 교육자가 되었다.

나를 변화시킨 또 한 번의 사건은 영어 과외로 한참 대학원 학비를 벌던 시절에 일어났다. 반에서 17등을 하던 그 친구는 내가 보아도 정말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성실한 스타일의 학습자였다. 과제도 열심히, 수업도 나름 열심히 듣지만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 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고 있는 사춘기 여학생이었다. 그 친구와의 수업에서 내가 한 일이란 영어 수업 후 독해를 2~3개씩 꼭 함께 하는데, 그때마다 지문에서 전개되는 내용들, 그 콘텐츠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에게는 즐거운 수다 시간이었고, 그 친구에겐 색다른 수다 시간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 내용이 프랑스 혁명에 관한 것이라면, 프랑스를 여행하듯 그 나라와 문화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나의 여행 경험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만약 그 내용이 자동차에 관한 것이라면, 자동차와 관련한 각종 이야기와 역사 등을 함께 찾아보기도 하고 더불어 나의 운전면허 획득기와 자동차 사고 경험 등을 함께 나누었다. 영어문법과 단어들은 그런 스토리텔링을 돕는 작은 도구일 뿐 원래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문화를 넘어서지 않게끔 그저 놀아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렇게 두서너 달이 지나자 그 학생이 스스로 독해집에서 특히 대화하고 싶은 주제를 체크해두기 시작했고, 많은 내용들을 미리 읽고 선별해 두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러고는 다른 문제집들을 사서 체크하기 시작하더니 매일 아침 가장 먼저 교문을 열고 들어가는 학생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학생이 전교 2등을 했던 날, 그 어머니가 내 손을 꼬옥 잡으시면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을 때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공부에 재미를 알아버린 학생은 그렇게 나의 스승이 되었다. 결국 학습은 가르치는 이의 몫이 아니라 학습하는 이의 몫인데, 그들에게는 자신의 지식과 이해의 틀을 확장시키는 경험들이 필요하고, 우리의 몫은 그 경험들을 잘 조직하여 전달하거나 아니면 그들 스스로 흥미를 갖고 경험하도록 자극하는 것임을 그 학생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 속에는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다. 지금 나의 학습이 무엇과 연관되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순간 학습은 의미를 갖게 되고 풍요롭고 즐거운 어떤 행위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모든 학부모들의 꿈인 ‘자기주도적’인 자발적 학습자는 사실 그 아이의 기본적인 성향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어떤 경험을 제공하는지, 어떤 성공의 메시지를 스스로 갖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로 나는 흔히 말하는 ‘창의자’, 내 방식으로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교육 상황에서 진정한 창의를 해야 하는 자는 배우는 이가 아닌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함을 잊지 않고 학습자에게 필요한 창의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로 했다. 교육하는 이로서 창의자가 되는 것은 때론 냉철한 논문을 써야 하고, 때론 솔직한 수필을 써야 하며, 필요할 땐 사전도 만들 수 있어야 하며, 기막힌 메타포를 활용한 시도 쓸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수업은 작가의 상상력과 새로운 시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야 하고, 쉽게 읽히고 심지어 쏙쏙 잘 들어오는 책과 같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활동이 된다. 읽는 노력을 들여서 읽고 이해하면 엄청나게 재미난 한권의 책 같은 수업, 내게 있어 여전히 가장 어렵고도 가장 흥미로운 도전은 바로 ‘수업’ 그 자체인 듯하다.

나를 변화시킨 세번째 사건은 또다른 나의 제자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나름 인기있는 과외 선생님이었던 내게 전교 꼴찌에 가까운 한 아이를 제발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중학교에 올라간 등치만 큰 남학생이었는데, 늘 싱글벙글 잘 웃고, 엉뚱한 질문들을 어찌나 해대는지 가끔은 난감하고 가끔은 너무나 재미있는 그런 학생이었다. 공부에는 정말 1도 관심 없었고, 15분을 앉아있기 힘들어 하는 나의 제자는 정말 제대로 만난 적수에 가까웠다. 거의 매일 공회전하는 수업을 완료한 것에 만족하던 내게 그 아이가 또 독특한 질문을 했다.

“선생님! 진짜 신기한데요…… 초콜릿에 하이타이가 적혀 있어요.”
“뭐라카노? 거기 어데 하이타이가 적혀 있어?”

나는 또 무슨 별난 소리인가 하면서 한 귀로 듣고 말려다가 무심코 그 초콜릿을 보았는데 정말 하이타이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해태의 영문명 ‘HAITAI’가 초콜릿에 떡하니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학생은 평상시 ‘nature’를 ‘나뚜르’라고 읽었고, ‘pencil’을 ‘펜실’이라고 읽는 아이였으니 그 아이의 ‘HAITAI’는 당연히 하이타이가 맞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운 발견이라며 나름 기가 차지만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늘 싱글벙글하던 아이는 더 싱글벙글 하면서 내가 관두는 그날까지 하이타이를 신봉했다. 나는 그날 이후 파닉스부터 문법에 이르는 모든 가르침의 방식을 일순간에 멈추고, 그 아이 방식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 영어로 대화가 될 리 없으니 적어도 영어에서 작은 성공 경험이라도 해야 이 아이가 제대로 된 학습을 시작이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런 노력은 이상한 곳에서 빛을 바란다. 그 학기 시험 문제에 요일을 제대로 쓰는 문제가 나온 것이다. 요일 중 가장 어렵다는 ‘Wednesday’를 가르치면서 그 아이의 방식대로 ‘웨드네스데이’로 가르쳤더니 그 반에서 d묵음을 빠뜨리지 않고 쓴 3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후로 가장 기쁜 날이 그 전화를 받은 날이라고 했었다.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르고 그 아이는 끝내 좋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고 늘 잘 웃는 대학생이 되었다.

거의 빵점에 가깝던 실력을 갖고 있던 아이의 놀라운 성장, 그렇게 그 아이가 다시 나의 스승이 되었다. 나는 그 제자를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는 지와, 작은 성공 경험이 어떻게 사람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Wednesday’를 맞춘 후 받은 박수가 동료들로부터 거의 처음 받아보는 박수였다고 했던 그 아이는 그 작은 성공의 트리거로 시작해서 독특하고도 이상한 영어 학습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그렇게 성장을 했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구조와 학습한 방식을 고수하며 아이들의 지적 구조나 암기방식, 혹은 이해의 방식을 들여다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 칩 히스가 말했던 일명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에 빠진 셈인데, 한번 학습한 지식은 학습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깊이나 폭에 의해 초보자들의 학습 상태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듣는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가르치는 자의 숙명은 바로 그 저주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에도 계속 내게 네 번째, 다섯 번째 사건들이 일어났었고, 나는 운 좋게 의과대학에서 학생들과 교수님들을 돕는 의학교육학교실의 교수가 되기 전, 그런 험한 경험들 속에서 무엇인가 얻는 행운을 조금 더 많이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도 가끔 간담이 서늘하거나 뒷골이 당기는 경험들을 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평생 나를 변화시키는 경험들을 계속 하게 될 것만 같다.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의과대학에서 경험하는 역할들은 매우 다양한데 나는 스스로를 교육과정이나 수업을 설계하는 ‘디자이너’이자 교육적 문제들을 발견하고 해결하고 또는 개선해 나가는 ‘문제해결 도우미’ 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수많은 회의와 대화들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도 나는 여전히 이 멋진 학습자들의 세상과 나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경험들을 사랑한다. 책 밖의 세상을 알게 하고, 그들의 숨은 무엇인가를 찾도록 돕고,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눈높이로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작가, ‘교수’라는 정체성은 이렇게 나의 변화와 경험들 속에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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