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의 발전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의 기전이 밝혀지고, 이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나오며 인류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넘어 질병을 갖고도 장기간 생존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기전을 위한 기초 연구에서부터 신약의 효과를 위한 임상 시험까지 의학 연구의 분야는 다른 학문과 비교하여 매우 넓은 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과 더불어 이비인후과의 연구도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전문성을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히 연구의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필자는 그중에서도 기초 연구와 임상 연구를 연결하여 새로운 질병 치료에 다가가는 중개 연구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필자는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한국 과학 기술 대학원 의과학과에서 석, 박사 통합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복귀하여 근무하고 있습니다. 군의관의 길이 아니라 대학원생의 길을 알아보게 된 것은 전공의 시절 모교의 윤주헌 교수님께서 해외에서 모셔 온 연구자의 특강을 억지로 끌려가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강연을 들었고 기억나는 것은 녹색 파란색 빨간색 점이 찍혀 있던 검은 사진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의 기전을 설명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이미 200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NGS는 필자의 전공의 시절에 다양한 암종에서 이미 연구가 되고 있었고, 모교의 은사님은 후학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강연을 마련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처음 접하고, 이미 해외에서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이비인후과 분야에 신기술을 적용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호기심은 결국 필자를 대학원 진학으로 이끌었고, 현재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연구는 거창한 계획이나 커다란 사명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아주 작고 소박한 궁금증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NGS 의 Sequencing image
우리는 항상 궁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환자들 가운데, 같은 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치료 반응이 서로 다른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또는 동일한 수술을 받고도 회복 속도나 후유증에서 차이를 보이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모두 훌륭한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라는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중개 연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의사뿐 아니라 생명과학을 하는 연구자들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왜 저명한 셀, 사이언스, 네이처 저널에 나오는 연구들은 쥐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는데 실제 임상까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은가? 왜 논문에 나온 결과는 재현이 잘 안되는 것인가? 생명과학이라는 분야는 쥐, 예쁜 꼬마선충, 세포주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하는 연구인 것인가? 실제로 인간을 기반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지 않은가? 이러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팀이 생성되고, 결국 인간에게서 시작된 연구의 주제를 기초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분석하고 다시 인간에게서 증명하는 중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다시 증명하니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확률 높은 연구에 더욱더 매진하게 되고 돈이 모이는 곳에 더욱더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고 연구자들이 많아지게 되니 인용 지수도 높아지고 학문도 넓어지게 됩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생명 연구 센터
이비인후과는 종양, 난청, 후각 및 미각 장애, 침샘 질환, 수면무호흡증, 자가면역질환 등 매우 다양한 질환을 다루는 과입니다. 이러한 질환들은 그 병태 생리와 치료 반응에서 개인차가 크며, 조직학적 특성과 면역학적 반응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중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오믹스 기술들, 예를 들면 단일 세포 전사체 분석, 후성 유전체 분석, 메타 지놈, 단백질 분석 방식 등을 적용하여 이비인후과 질환의 복잡한 병태 생리와 개인차를 정량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게 합니다. 지금까지 유의미한 통계학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코호트에서의 분석이 필요하였다면, 이러한 분석은 기존에 하나의 질환으로 묶였던 임상 진단을 세분화하고, 코호트를 분류하여 더 적은 검체를 이용하여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또한 인공지능(AI)과 기계학습 기술의 발달은 중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코호트를 세분화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코호트에서 수집된 다채널 생체신호 데이터를 AI로 분석하여, 기존의 분류 기준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환자 군집을 정의하고, 이에 기반한 예후 예측이나 맞춤 치료 전략을 개발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영상 분석 기술의 발달로, 내시경 이미지나 CT/MRI 영상에서 암 재발 위험을 예측하는 알고리즘도 개발되고 있어, 임상과 실험실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또한 국내에서는 다기관 공동연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환자 데이터 수집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환자의 임상 정보와 유전자 정보, 치료 반응 등을 통합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인프라와 기술적 진보가 결합하면, 향후 이비인후과 분야에서도 환자 맞춤형 진단·치료의 실현에 보다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단지 논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환자의 치료 전략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끌림은 이비인후과와 협업을 통해 실제 임상에 적용 가능한 연구를 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개 연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결국 호기심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환자를 치료하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차이, 치료 반응에 차이를 보이는 환자 간의 차이 같은 것을 궁금해한다면 이것이 중개 연구를 위한 첫걸음이자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연구자 마인드를 배우고, 연구를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러한 호기심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중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연구는 저명한 책임 연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주도하여 진행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세분화된 전공 분야가 있고, 높은 파급력을 가진 연구를 위하여 여러 전공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하여 하나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트렌드이자 장려되는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파이펫을 잡아보지 않았고 세포주가 무엇인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여러 번 해본 전문가와 협업하여 연구를 진행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비인후과라는 분야의 전문가들이기에 중개 연구에서도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실제 환자에게서 증명하는 부분은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는 가장 파급력 있는 요소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해야 하며, 협업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의대 선호 사상은 국가의 인재들이 나라 발전을 위한 이공계가 아니라 의학 계열의 쏠림으로 이어져 국가의 경쟁력을 저하시킨다는 우려가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는 오히려 의학 계열의 연구 경쟁력을 높이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수십 년 전만하여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경쟁력 있는 저널에 국내 연구진으로만 이루어진 팀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다국적 임상 시험에서도 국내 연구진의 활약이 돋보이고, 국제적인 학회에서 국내 연구진의 연구 성과 발표가 주목을 받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이러한 발전의 기저에는 임상 영역과 기초 연구 영역의 협업이 하나의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셀, 네이처, 사이언스 등 높은 관심도를 가지고 있는 저널에서 임상 시험과 함께 기전을 연구한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자매지의 이름에 medicine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인용 지수가 높아지는 현상은 결국 실제 치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개 연구에 대한 전 세계적인 높은 관심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트렌드에 맞추어 발 빠르게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국내 연구진들이 높은 성과를 보이고, 이를 통해 세계적인 의과학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중개 연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 바로 환자 곁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진료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환자의 다양한 반응과 결과들이 모두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진료 중에 수많은 데이터를 마주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아직 해석되지 않은 생물학적, 임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개 연구는 이처럼 일상적인 임상현장에서 출발하여,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과학적 탐구의 여정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사와 기초 연구자 간의 활발한 소통과 공동의 문제 인식이 필수적이며, 중개 연구는 바로 이러한 통섭의 장을 제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중개 연구는 또한 교육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임상 수련 과정에서 단순히 진료 스킬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라는 질문을 품고 연구적 사고를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중개 연구를 수행하는 교수진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롤모델이 되어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physician-scientist 양성 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 연구, 진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삼각 구조 속에서 병원은 더욱 강력한 학문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학문과 임상의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의미의 환자 중심 의학을 실현하는 기반이 됩니다.
연구라는 길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이비인후과 의사가 중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최적의 시기입니다.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환자를 위한 해답을 찾는 여정에 동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여정의 끝에는 분명, 환자와 의학 모두를 위한 의미 있는 진보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단지 임상 의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의학 지식의 창출과 환자 치료의 혁신을 이끄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