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작가님은 2022년 SBS에서 방영된 ‘왜 오수재인가’를 집필했습니다. 고양이 여우, 호두와 함께 지내며 행복하고 위안받은 기억들을 즐겁게 소개합니다.
이기적이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와 고독을 즐긴다. 그렇다고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집요하게 요구할 땐 대단한 끈기로 시간 불문, 상대 불문, 결국 사람을 굴복시키고 마는데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다. 넌 내가 선택한 사람이므로 내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란다, 그 이기적인 면모가 매력적인 동물, 고양이와 함께 지낸 지 20년이 넘는다.
<사진1. 첫째 고양이 ‘여우’>
첫째 고양이는 ‘여우’. 동생이 모란시장에서 구조하듯 데려온 여우는 자존심이 셌다. 고양이란 이런 거란다, 너희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매 순간 완벽한 존재지, 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여우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품격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줬다. 열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사람으로 치면 장수한 고양이였는데, 마지막 두 달 동안 촛불이 꺼져가듯 생명이 다하는 모습을 조용히, 생색내지 않고,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려 무던히 애쓰며 떠났다.
<사진2. 둘째 고양이 ‘호두’의 어린 시절>
여우가 나이가 들어 무기력해졌을 때 명랑한 동생이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데려온 친구가 둘째 고양이 ‘호두’다.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된 호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해 나동그라질 정도로 작았는데, 열한 살이 된 지금은 8킬로그램이 넘는 거구가 됐다.
<사진3. ‘호두’의 거침없는 성장기 시절>
<사진4. ‘여우’와 ‘호두’의 눈으로 대화>
<사진5. ‘호두’는 늘 내 대본을 보며 하품을 한다>
내가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를 쓰던 긴 시간 동안, 호두가 내게 준 응원과 격려는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아니 자주, 아니 사실 매일 매 순간 글이 안 써질 때, 그래서 세상이 온통 답답하다 느껴질 때, 그 펑퍼짐한 엉덩이와 늘어진 배를 내밀고 내 노트북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호두를 볼 때면 픽 웃음이 나 한 숨 돌릴 수 있었고, 그러다 쓰지 못했던 대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물론 내 집중력에 늘 도움만 되는 건 아니라, 때론 한참 일이 잘 될 때 키보드 그만 두드리고 당장 밥을 내놓아라, 아니 이거 말고 더 맛있는 것을 내놓으란 말이다, 신선한 물로 바꿔라, 내가 이제 배가 부르니 내 털을 빗겨라, 털이 가지런해졌으니 나와 놀아라 등등 흐름을 끊을 때도 많았지만, 그 역시 감정에 솔직한 고양이의 매력인 것을, 많은 순간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인간보다 훨씬 근사한 존재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진6. 매 순간 당당한 ‘호두’>
내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살금살금 다가와 아주 조심스러운 발짓으로 내 얼굴을 톡톡 건드려 깨워주는 다정한 존재, 내가 울적해있으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꾸벅꾸벅 조는 모습으로 나를 웃게 만드는)신기한 존재,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운이 좋은 일이다.
그러니 그 멋진 존재와 함께 지내며 비염이 더 심해지는 것 따위,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자주 가는 이비인후과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면, 딱 나처럼 재채기를 하고 코를 푸는 의사선생님께서 “고양이를 키우면 비염 절대 안 나아요. 고양이를 멀리 해야 돼요.”하시는데, 10년 넘게 보는 그 분 역시 비염을 달고 지내며 나와 똑같은 약을 드신다하니 비염은 불치병인 게 분명하고, 어차피 불치병인 거 고양이는 비염과 별 연관이 없다라는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는 한 마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 가족이 밥을 챙겨주는 동네 길고양이는 20년 동안 어림잡아 50마리는 족히 넘었으며, 그 중엔 새끼를 데리고 오는 엄마고양이들도 많았다. 그 새끼들이 또 커서 자기 새끼를 데려오기도 하고, 2대, 3대가 이어지는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회전이 좋아 어떤 사람이 자기를 반겨하고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채 물리적 거리를 조절하는데,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눈치 없는 사람보다 고양님들이 더더더 훌륭하십니다, 찬사를 보내게도 된다. 이 글을 읽는, 길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미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신비로운 존재를 잠깐이라도 가만히 관찰해보시길 권한다. 실은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의 것도 아니고, 인간이 가장 우위에 있는 존재도 아니며, 어쩌면 우리가 고양이의 세상을 침범하고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품위 있던 여우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어간다. 이제 열한 살이 된 호두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테고, 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서로의 언어로, 서로의 눈빛으로 우린 만나는 순간 통했고 점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딱 한 번 사람의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이 호두가 떠나기 직전에 온다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랑 사는 거 괜찮았어?”
그 말에 호두가 씩 웃으며 대답해주길 바란다. “꽤 괜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