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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Tian June 2023 W-ENTian June 2023

고양이와 작가와 비염 드라마작가 김지은

김지은 작가님은 2022년 SBS에서 방영된 ‘왜 오수재인가’를 집필했습니다. 고양이 여우, 호두와 함께 지내며 행복하고 위안받은 기억들을 즐겁게 소개합니다.

이기적이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와 고독을 즐긴다. 그렇다고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집요하게 요구할 땐 대단한 끈기로 시간 불문, 상대 불문, 결국 사람을 굴복시키고 마는데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다. 넌 내가 선택한 사람이므로 내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란다, 그 이기적인 면모가 매력적인 동물, 고양이와 함께 지낸 지 20년이 넘는다.


<사진1. 첫째 고양이 ‘여우’>

첫째 고양이는 ‘여우’. 동생이 모란시장에서 구조하듯 데려온 여우는 자존심이 셌다. 고양이란 이런 거란다, 너희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매 순간 완벽한 존재지, 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여우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품격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줬다. 열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사람으로 치면 장수한 고양이였는데, 마지막 두 달 동안 촛불이 꺼져가듯 생명이 다하는 모습을 조용히, 생색내지 않고,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려 무던히 애쓰며 떠났다.


<사진2. 둘째 고양이 ‘호두’의 어린 시절>

여우가 나이가 들어 무기력해졌을 때 명랑한 동생이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데려온 친구가 둘째 고양이 ‘호두’다.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된 호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해 나동그라질 정도로 작았는데, 열한 살이 된 지금은 8킬로그램이 넘는 거구가 됐다.


<사진3. ‘호두’의 거침없는 성장기 시절>


<사진4. ‘여우’와 ‘호두’의 눈으로 대화>


<사진5. ‘호두’는 늘 내 대본을 보며 하품을 한다>

내가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를 쓰던 긴 시간 동안, 호두가 내게 준 응원과 격려는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아니 자주, 아니 사실 매일 매 순간 글이 안 써질 때, 그래서 세상이 온통 답답하다 느껴질 때, 그 펑퍼짐한 엉덩이와 늘어진 배를 내밀고 내 노트북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호두를 볼 때면 픽 웃음이 나 한 숨 돌릴 수 있었고, 그러다 쓰지 못했던 대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물론 내 집중력에 늘 도움만 되는 건 아니라, 때론 한참 일이 잘 될 때 키보드 그만 두드리고 당장 밥을 내놓아라, 아니 이거 말고 더 맛있는 것을 내놓으란 말이다, 신선한 물로 바꿔라, 내가 이제 배가 부르니 내 털을 빗겨라, 털이 가지런해졌으니 나와 놀아라 등등 흐름을 끊을 때도 많았지만, 그 역시 감정에 솔직한 고양이의 매력인 것을, 많은 순간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인간보다 훨씬 근사한 존재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진6. 매 순간 당당한 ‘호두’>

내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살금살금 다가와 아주 조심스러운 발짓으로 내 얼굴을 톡톡 건드려 깨워주는 다정한 존재, 내가 울적해있으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꾸벅꾸벅 조는 모습으로 나를 웃게 만드는)신기한 존재,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운이 좋은 일이다.

그러니 그 멋진 존재와 함께 지내며 비염이 더 심해지는 것 따위,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자주 가는 이비인후과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면, 딱 나처럼 재채기를 하고 코를 푸는 의사선생님께서 “고양이를 키우면 비염 절대 안 나아요. 고양이를 멀리 해야 돼요.”하시는데, 10년 넘게 보는 그 분 역시 비염을 달고 지내며 나와 똑같은 약을 드신다하니 비염은 불치병인 게 분명하고, 어차피 불치병인 거 고양이는 비염과 별 연관이 없다라는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는 한 마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 가족이 밥을 챙겨주는 동네 길고양이는 20년 동안 어림잡아 50마리는 족히 넘었으며, 그 중엔 새끼를 데리고 오는 엄마고양이들도 많았다. 그 새끼들이 또 커서 자기 새끼를 데려오기도 하고, 2대, 3대가 이어지는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회전이 좋아 어떤 사람이 자기를 반겨하고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채 물리적 거리를 조절하는데,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눈치 없는 사람보다 고양님들이 더더더 훌륭하십니다, 찬사를 보내게도 된다. 이 글을 읽는, 길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미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신비로운 존재를 잠깐이라도 가만히 관찰해보시길 권한다. 실은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의 것도 아니고, 인간이 가장 우위에 있는 존재도 아니며, 어쩌면 우리가 고양이의 세상을 침범하고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품위 있던 여우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어간다. 이제 열한 살이 된 호두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테고, 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서로의 언어로, 서로의 눈빛으로 우린 만나는 순간 통했고 점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딱 한 번 사람의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이 호두가 떠나기 직전에 온다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랑 사는 거 괜찮았어?”

그 말에 호두가 씩 웃으며 대답해주길 바란다. “꽤 괜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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