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인후과에서 점점 성형수술을 하는 빈도가 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코 성형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의 레지던트 시절에도 무려 대학병원에서도 코성형은 꽤 많이 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고, 아마 학회 회원님들 중에서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을 거 같다.
그렇다고 필자가 성형 수술 자체에 대해 다루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필드에서 수술을 하고 있지 않으니, 당연한 얘기다. 그래서 좀 더 재밌을만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바로, 코 성형의 역사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시행되는 성형 수술은 쌍꺼풀이다. 압도적으로 많이 이루어지는데, 그렇다면 최초의 성형수술도 눈 부위에 이루어졌을까? 아니다, 코다. 그것도 무려 기원전 9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있다. 당시 인도에는 꽤 끔찍한 형벌이 있었는데,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간음과 같은 죄를 저질렀을 때 가해지던 형벌이다. 죽이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아 저 사람은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걸 인지하길 원했다. 그렇기에 함무라비 법전처럼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대신, 눈에 띄는 얼굴에 무언가를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노예로 삼았을 때 노동력을 상실하지 않기를 원했다. 눈이나 혀, 귀 등의 주요 감각을 담당하는 기관은 살아 남았다. 대신 잘린 것이 코다. 물론 코가 잘리게 되면 일단 바람이 불 때 이물질이 그냥 들어가고, 비가 내릴 때 비가 그냥 들어가고, 무엇보다 비강 호흡을 할 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점이 사라지겠지만, 고대인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던 거 같다.
그렇게 벌을 받은 사람들이 노비 생활을 하다가 도망치거나, 또는 주인집도 망해서 몰락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가장 원한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코의 재건이다. 당시 슈스르타라는 인도의 명의가 쓴 슈스르타 상히타라는 책을 보면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그림과 같이 이마근을 스페이드 모양으로 잘라, 코로 돌려 재건했다. 국소 피판술을 시행했다는 얘기다. 슈스르타라는 의사가 혹시 시간 여행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대단히 혁신적인 수술이다.
이 슈스르타 상히타라는 저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정벌을 시도했을 당시 유럽으로 전래되어 의학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코 재건술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에서는 사람의 코를 자르는 형벌이 존재하지 않아, 이 수술에 대해 별다른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형 수술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구개구순열에서 입술 정도는 봉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타까운 건, 당시에는 감염에 대한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고 또 괴사에 대한 개념도 없어 더러운 실로 세게 당겨 꼬매는 것이 수술의 전부였다. 그 탓에 많은 환자들이 오히려 수술 때문에 사망하거나 더 큰 결손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구에서 성형 수술, 즉 모양을 개선하거나 변형하는 수술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세월이 무지막지하게 흐르고 나서야 다시 성형수술이 인류사에 등장한다. 때는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가 열린 이후의 일이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에 가서 금과 은 그리고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들고 왔다는 건 다 알고 있을거다. 또 가면서 구대륙의 많은 질환을 가지고 갔다는 것도.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콜롬버스는 신대륙에서 매독을 들고 왔다.
당시 유럽에서 콜롬버스의 인기는 어느정도였을까. 무려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이 사내는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동료나 부하 선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매독은 전유럽을 휩쓸게 되는데, 당시의 매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매독에 비해 훨씬 더 독했다. 아직 인류에게 덜 적응한 탓에 치사율도 높고 질환의 경과 또한 험악했던 것.
이 매독의 주된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코의 결손이었다. 말 그대로 코가 괴사를 한다는 건데, 이것은 당시 유럽의 귀족들에게 있어 굉장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성병의 기전은 알지 못했지만 매독이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주로 걸리는 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의 결손은 곧 매독을 뜻했고, 당연히 당사자의 문란함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어떻게든 이를 개선하기 원했던 귀족들 덕에 성형수술이 다시 성행하게 된다.
불행한 일은 당시 유럽의 의사들은 슈스르타 상히타의 존재를 잊은지 오래라는 점이다. 떄문에 그들은 독자적인 수술을 시행했다. 우선 대장장이에게 가서 영주의 원래 코 모양에 맞춰서 쇠로 모양을 만들었다. 그 다음엔 무두장이에게 가서 소가죽 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쇠 위에 덮고 그것을 환자 얼굴에 봉합했다.
이 수술은 이물질로 인한 거부반응과 감염을 통해 여러 영주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실로 죽음의 수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수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래, 여러 지방에서 자행되었다. 당시엔 통신 기술이 없어 다른 곳으로 이 비극이 전달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느정도 해결한 것은 안토니오 브란치라는 의사다. 그는 코 모형을 양피지나 가죽으로 만든 후, 팔뚝에 대고 그대로 선을 그었다. 그리곤 팔뚝 살의 한면을 담긴 채, 나머지 면만 잘라다가 팔을 들어 올린 후 환자의 얼굴에 봉합했다. 이대로 그냥 있으면 너무 힘들 테니 팔을 머리에 묶어서 고정한 후, 2주가 지나면 나머지 면을 팔뚝에서 잘라 코를 분리하고 구멍을 뚫어 콧구멍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 조금 이상한 모양새를 가진 수술은 곧 코 재건의 대세 수술이 되어 수백년 동안 유럽의 코 성형을 지배한다. 사실상 20세기 초까지도 이 수술에서 그렇게 커다란 발전을 하진 못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랬던 코 성형수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1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까지의 전쟁과 많은 것이 달랐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역시 참호전이다. 다시 말해 군인들은 땅을 파서 참호 안에 숨은 채 거기에 서서 총을 쐈다. 그렇다면 가장 빈번하게 노출이 되는 곳이 어딜까? 얼굴이다.
당시 의학기술로는 눈이나 얼굴 다른 부위에 총탄이나 폭발물로 인한 손상이 발생했을 경우 살릴 확률이 극히 희박했다. 그에 반해 코는 만약 돌출된 곳만 다쳤다면 충분히 살려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코가 없는 채로 살아남게 된 병사들이 수도없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나온 수술이 ‘Tube pedicled transplant’라는 수술이다. 말 그대로 피판에 사용할 피부와 연조직을 관모양으로 성형한 후, 양쪽 끝을 고정한 후 주기적으로 절단하여 대상 부위로 점차 이동하는 재건술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Harold Gillies가 고안한 수술로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에 가까운 수술이다.
이 외에도 사실상 현대적인 코 재건 수술의 기초가 되는 발상이나 수술이 이 당시에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주로 미용 목적으로 하는 수술이 원래는 형벌과 전쟁으로 인한 결손을 해결하고자 했던 수술이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아마 다른 수술이나 질환에도 역사를 캐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탐구해보는 것도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병원 생활에 한가지 낙이 될 거 같다.